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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봉양면 대덕교회 사모이야기
2003-11-16 07:30:51 read : 65536
"요즘 밥하느라 정신 없어요.”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말에 수화기 너머 허허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이다. 생각보다 호탕한 목소리, 분주한 분위기가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만 대답을 얻어내고 싶은 욕구는 강렬해지기만 한다. “제가 뭐 한 일이 있어야지 얘기를 하죠, 교회 얘기라면 몰라도….” 다시 허허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 웃음에 동참하고야 만다.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곡3리 산 1114번지. 수화기 너머 호탕하게 웃던 그가 사는 동네다. 구불구불 외길을 타고 들어가니 뽀얀 흰 건물이 눈길을 끈다. 주위에는 옹기종기 소박한 집들이 모여 있어 시월의 찬바람도 따습게 느껴진다. 대덕교회 민형자 사모. 성도라고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시골 교회에서 그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사는 이야기를 풋풋하게 전해 주는 글쟁이 사모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연륜인 듯 싶지만, 생과 사를 오가며 얻은 그만의 여유이다. 그의 오늘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회 문턱을 넘나드는 성도들이 있다. ‘말로 다 못한다는 성도들의 사랑’에 젊은 사모는 사역이 아니라 삶을 배워간다.
나이 든 동네 대덕골의 하루
교회는 마을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자리한 주택들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교회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첫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 계단이다. 곧 본당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목침에 쓰는 나무로 만든 거예요.” 웃옷을 걸친 차림으로 마중 나온 민 사모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예정된 시각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민 사모는 꽤 분주해 보인다. 성도 한 분이 소천하셔서 장례를 치르고 방금 돌아왔다며 기자 일행을 본당 옆 사택으로 안내한다. 사택 안으로 들어서니 대뜸 주방부터 시작된다. 주방 분위기는 가정집이기보다 식당으로 쓰이는 듯 규모가 꽤 크다. 뚝딱뚝딱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넨다. 민 사모는 교회의 집사님이라고 눈인사를 주선한다.
5분이나 지났을까,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자리에 앉기까지 사모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눈길이 바쁘고 손놀림이 그렇다. 오랜만에 보는 스테인리스 차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연신 주방을 향해 “집사님, 커피 드실래요?”하고 묻는다. 수화기 너머 들리던 화통한 목소리 그대로다.
“차만 타고 다녔는데도 눈이 안 떠지네요.” 시골에서 목회하는 그에게 성도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낯설지 않다. 성도가 소천하면 남편 김형기(43세) 목사는 염을 하고 그는 시신을 곱게 단장한다. 그런 그에게 김 목사는 “메이크업 기사”라고 말한다. 방금 전 장례를 치른 성도는 병환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다 돌아가신 분이었는데 화장을 해 놓고 보니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며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마을이 조용하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모두 바람 쐬러 갔기 때문이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덕골에 사는 사람들 이 더 보고 싶어진다. 4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 17가정이 대덕교회 성도들이다. 마을의 약 절반이 교인이며, 그들은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집사님, 커피 한 잔 주세요”
기자 일행에게 마을을 안내하면서 목사 내외는 마을 분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하다. 마을 사람들은 허리가 굽고 주름 많은 손에 지팡이를 친구 삼지만 천천히 걷는 법이 없다. “교회에 일이 있으면 아침 6시까지 모두에게 전화를 드려야 해요. 다들 일하시느라 바쁘시거든요.” 성도들이 그러하기에 민 사모 또한 손놀림이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빨래터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사님,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한다. 커피를 타 드려도 뭣할 처지인데, 허리가 굽어 걷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노인에게 커피를 타 달라는 그의 마음은 무엇일까. 커피 한 잔 달라는 그의 말에 할머니 집사님의 얼굴은 화색이 완연하다.
방 한 칸에 텔레비전, 가스레인지, 장롱 위로 걸린 말씀 하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심방에 동참한 장로님의 기도에 방안은 아멘 소리로 가득하다. 여든 다섯 장로님이 일흔 넘은 여집사님을 위해 주님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달라며 무릎을 꿇는다. 그 사랑과 믿음에 아멘을 얹으며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빛 바랜 벽지가 애잔하지 않다.
“벽지 바른 지 얼마나 됐죠?” 김 목사가 다시 도배장이가 되는 순간이다. 허물어져 가는 집이지만 깨끗한 보일러가 설치돼 있는 것도 김 목사의 손길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아끼는 것이 몸에 밴 분들이라 좀처럼 보일러를 잘 켜지 않는다고 민 사모는 말한다. 더러 집을 찾아 와야 보일러도 켜고 집안도 훈훈해진다며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를 덧붙인다.
김 목사 내외가 대덕골로 들어온 지 벌써 15년째다. 1989년 신학생이던 남편을 따라 민 사모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성큼 발을 디뎠다. 이미 시골에서 농촌 목회를 하기로 마음을 합한 두 사람이기에 아무런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이든 성도들과 웃으며 지내게 되기까지는 많은 무릎과 눈물이 있었다. 대부분 시골 교회가 그러하듯, 이들 역시 곧 떠날 사람들로 비쳐진 것이다. 김 목사 내외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촌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던 처음 몇 년 동안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김 목사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민 사모는 큰딸 은실과 함께 무섭고 외로운 밤들을 견뎌내야 했다. 작지만 힘이 되어준 은실은 이제 엄마보다 훌쩍 더 커서 벌써 고등학교 1학년이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너무 없어 학생 수를 늘일 생각으로 막내 평강을 낳았다며 민 사모는 너스레를 떤다.
김 목사 부부가 목회자이기보다 ‘대덕리 서비스센터’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도 하루에 서너 번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사역 초기에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마을 사람들이 급히 시내로 나갈 일이 생기면 운전 기사가 되어주고, 머리를 잘라야 할 때는 이발사가 되어주며, 목욕해야 할 때는 목욕탕을 내어주고 씻겨주며 십여 년을 지내왔다.
마을 어디를 가나 성도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교회가 참 좋습네다. 목사님이랑 사모님이 아주 사랑이 많으시고 좋습네다.” 한 분뿐인 대덕교회 장로님의 말이다. 그는 서울에서 은퇴 장로로 계시다 이곳에 오게 되었다며 대덕교회 자랑에 여념이 없다.
아픈 사모, 울보 사모
“성도님들은 땡볕에서 일하시는데 사모가 분 바르고 다니는 것이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화장도 못했는데, 요즘 집사님들이 저더러 화장도 하고 이쁜 옷도 입으라고 하세요.” 얼굴만큼이나 고운 그의 마음씨다. 사역 초기, 나이 어린 사모가 시골에 와서 노인들과 부대끼며 맞춰 가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친정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에게 누구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그는 할머니 집사님들이 어머니라고 말한다. 너무나 많은 어머니들이 곁에 있어서 힘든 일도 감당할 수 있었단다.
지난 여름, 그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유방암이었다. 여섯 번의 항암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머리를 깨끗이 밀었다. 작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 사모가 암에 걸려 머리까지 없으니 얼마나 덕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나 섣부른 걱정이었다. 성도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은 그의 평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들로 자리하고 있다.
사택 거실에 자리한 작은 탁자 유리에 카드 한 장이 꽂혀 있다. “사모님의 짧아진 머리가 감사해 핀을 선물합니다.” 찬찬히 카드를 읽고 있는 기자를 보며 “선물로 받은 머리핀보다 그 카드가 고마워 끼워 뒀어요”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항암 치료가 시작돼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다시는 나지 않을 것 같던 머리가 나게 되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죽을 줄 알았던 사모가 다시 건강해지고 머리카락이 하나둘씩 나기 시작하는 것이 너무 감사해 그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작지만 머리핀을 선물했다는 성도의 마음이 마냥 고마울 따름이다.
“대덕교회 할머니 집사님들이 저에게 보여준 사랑은 말로 다 못해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저 제가 건강해져 그분들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는 게 보답하는 길인 것 같아요.” 항암 치료가 한 번씩 끝날 때마다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함암 치료를 위해 입원해야 할 때면 차에 오르기조차 싫어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으면 밖에서 나이든 어른들이 한참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불이며 몇 가지 보따리를 싸 들고 그 노인들이 아픈 사모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울지 않았다. 눈물을 삼키며 기도할 뿐이다. 힘들어하는 사모를 차에 밀어 올리며 “사모님, 꼭 승리하고 오세요”라는 그 한마디를 지금도 그는 잊지 못한다.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결국 눈가는 촉촉해지고 만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민 사모였지만 죽음 앞에서 많이 움츠러든 모양이다. 성도들이 있고 목회를 돌봐야 했기에 김 목사는 아픈 아내 곁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새벽 기도를 인도하고 나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교회 일을 대충 정리한 후에야 잠깐 병원에 들르는 것마저 사모는 미안해 했다.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호기도 부렸다. 링거 병을 들고 혼자서 밤새 물을 떠다 마시며 고통과 대면했다. 침상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잘 안다. 수술을 받는 동안 “사모님을 대신해 저희를 데려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던 그 할머니 할아버지 집사님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제천시 봉양면 대덕골 이야기. 대덕교회 주보 한 켠을 7년째 지키고 있다. 가난한 시골 교회의 사모로 살면서 그가 느낀 신앙과 주변의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잠겨있는 빗장을 풀게 하고 딱딱해진 생각들을 부드럽게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변화들을 낳고 있다. 잔잔한 감동으로 채워지는 그 주보들이 모여 「포도주와 빨간 사랑」이라는 책을 엮어 냈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주보는 빠지지 않고 발행됐다. “그 글마저 쓰지 못한다면 성도님들이 저에 대해 너무 걱정하실까 봐 2시간씩 꾹 참고 썼어요.”
대덕교회 수요일은 파랗다
그에게 대덕골은 다시 생명을 맛보게 한 곳이다. 사역이 너무 바빠 언젠가 ‘내가 식모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는 그에게 잠깐 쉼을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한다는 민 사모. 그래서 그는 요즘 하루 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다시 아프지 않을까, 또 항암 치료를 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윈 없다. 어차피 죽을 뻔한 사람이었기에 이미 오늘은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되고 사역이 안정돼 갈 때 왜 그런 일들이 생겼을까, 왜 하필 나일까 하는 생각도 그는 애써 외면한다. 너무 바쁜 것을 불평했고 일할 것이 많은 것에 감사하지 않았던 자신을 회개했다고 고백한다.
아픈 사람들에게 아픔을 겪어본 자신이 하는 말 한마디가 작지만 진실한 위로가 되지 않겠느냐는 그는 또 다른 사역들을 준비하고 있다. A4 용지 한 장에 칸칸이 나눠진 대덕교회의 이야기들은 대덕골 가족들 외에 130부 정도가 외부로 발송된다. 요즘 그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재소자들이다. 담 안에서 보내는 그들의 편지에는 어떤 고민이 있고, 출소 후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그는 사람마다 일일이 목록을 만들어 정리하고 있다. 3주에 한번씩 발송하는 주보와 함께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편지를 넣는다.
그의 마음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한 것만큼이나 사택도 늘 사람들 차지다. 주일이나 수요일이나 새벽 기도 때나 참석하는 숫자가 항상 비슷하다는 대덕교회. “아이들은 여기 들어오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요. 배가 고파서 여는 게 아니라 목사님 냉장고를 마음대로 열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냉장고도 열어 보고 침대에서 마음대로 뒹굴며 노는 모습을 보면 배가 다 부른 것 같아요.”
함께 예배를 드린 수요일 저녁,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택은 안방 거실 할 것 없이 사람들로 그득하고 아이들의 소리는 정겹기만 하다. 시내에서 퇴근해 와서 저녁밥도 못 먹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훌쩍 가버리는 것이 안쓰러워 함께 식탁을 나누는 사람들. 커피 인심이 좋은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시골이라 먹을 게 없어서 그렇죠, 뭐. 할머니들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며 소탈하게 웃는 젊은 성도들. 놀다가 목욕탕에 옷을 벗어놓고 나중에 와서 옷장에서 깨끗이 개켜져 있는 옷을 꺼내 입는 아이들. 이들 속에 있는 민 사모의 얼굴은 행복하다.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 전에 이미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대덕교회의 수요일은 파랗다. 수요 예배가 있는 날이 파란 색으로 표시된 교회 달력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스물 한 명, 나란히 앉은 할아버지 네 분을 시작으로 할머니들이 돋보기 안경을 쓰고 박수를 치며 찬양을 드린다. 1절뿐인 단조롭기 그지없는 찬양을 네다섯 번 반복해도 소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성가대원이 돼 매주 특송을 하고 성가대 찬양을 드린다. “아이고 왜 이렇게 떨려? 아이고 떨려”하면서도 언제나 특송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는 분들이다.
아멘 아멘, 천국을 닮았네
“주님 계신 영광의 나라, 금은 보화 다 준다고 해도 나는 나는 기쁘지 않아, 세상 영화 부럽지 않아.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기름 등불 준비합시다. 주님 따라 우리 모두 깨어 있어 기도합시다. 아, 그 영광의 나라, 나는 기다리오니 할렐루야, 나는 가리라 주님 계신 영광의 나라.”
할머니 집사님들에게 찬양집을 펼쳐 드리는 사모의 손길이 바쁘다. 작은 예배당을 꽉 채운 수요 예배는 은혜 속에 깊어간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없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김 목사의 설교에 ‘아멘’의 화답이 마음에 와 닿는다. 꼬깃꼬깃 접어둔 5,000원을 헌금한 할머니 집사님이 눈에 밟혀 시내에서 5,000원짜리 식사 한 끼도 못한다는 김 목사 부부다.
받아주는 이 없고 기다려주는 이 없는 노인들을 받아주고 기다려 주는 예수님을 전하는 민형자 사모. 자신의 눈물과 아픔과 투병을 받아주시고 기다려 주신 그분이 곁에 계시기에 그는 지금도 대덕리 사람들과 오래도록 있으려 한다. 지난 날의 모든 상처를 씻고 그는 이제 대덕골에서 시시콜콜 삶을 나누는 사모라서 행복하단다.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는 시골 교회 사모라서 감사하단다. “이렇게 큰 교회에 다니시니 좋죠?” “세상에서 이렇게 이쁜 사모 봤어요?” 새벽 기도에도 툭툭 빠지는 게으른 사모를 책망하지 않으며 무던히 기다려 주는 성도들에게 민 사모는 딸처럼, 며느리처럼 살아간다. ‘불평은 새끼를 치더라’며 좋은 것, 감사한 것만 보며 산다는 민형자 사모에게 대덕골은 날마다 일궈가야 할 천국이다.
빛과 소금/ 글·송민희 기자 / 사진·이성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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